강사 |
박훈 서울대학교 교수 |
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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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19-09-03 PM 14:11: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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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일본은 누구인가: 근현대사 속의 일본
연사: 박훈 서울대학교 교수
■ 일본은 누구인가 : 근현대사 속의 일본 – 박훈 서울대학교 교수
우리에게 일본 역사 하면 굉장히 생소하다. 잘 모르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비롯된 문제들이 태반을 차지하고 있다. 지금 한일 관계가 뜨겁게 전개되고 있지만 이럴 때일수록 장기적인 안목에서
‘지피지기(知彼知己)’ 의 자세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이번 IMI 조찬은 그러한 의미에서 준비되었다.
▶메이지 유신? 원동력은?
메이지 유신은 약 150년 전 근현대 일본을 만들어 낸 원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이른바
근대화와 서양화에 성공한 사례, 궤도를 잡은 포인트가 되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신분 제도 타파, 서양 문물 도입 등 과감한 개혁을 실시하여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하였고 지금의 일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18세기 후반, 200년 동안 전쟁이 없던 평화시대에 러시아가 오면서 일본은 다른 주변국가와는
달리 외부환경의 변화를 예민하게 감지하였고 위기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또한 19세기 초 해양세력과 증기선의 등장으로 그동안 요새라고 생각했던 사방의 바다가
위험요소로 뒤바뀌면서 해국일본이라 하는 일본 안보 개념의 대전환이 되었다.
이러한 위기의식이 내부 개혁의 큰 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메이지 유신의 발생계기는 외부로부터의 도전, 대위기였다.
위기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외부로부터의 도전에 어떻게 대응했느냐 하는 방정식에 의해서
모든 역사가 결정된다. 일본은 위기감을 원동력으로 세계 흐름의 변화에 과감하게 대응하였고,
이때의 선택으로 지금까지의 150년을 결정지었다.
▶일본의 근대화부터 현재까지
일본은 아편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를 보고 강경노선이 아닌 화해노선으로 외교노선을 전환했고,
변화하는 외부환경에 의해 내부 개혁에 대한 자극이 생겨났다. 그리고 1860년대 중반부터는
위정척사파는 사라지고 나름의 근대화 노선을 갖고 경쟁하는 근대화 경쟁시대로 접어들었고
근대화 정책을 펼침으로써 근대화에 성공했다.
일본이 이렇게 위기감을 느끼면서도 나라를 걸어 잠그는 것이 아닌 근대화를 추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세계문명의 중심이 더 이상 청나라가 아니라는 세계의 흐름을 읽었을 뿐만 아니라 내부 개혁을 위해, 자국 자존심의 상처, 즉 아이덴티티의 위기까지 장기적인 국가 성장을 위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1930년대 후반, 군인들이 일본 정치 전면에 등장하면서 군부는 아이덴티티 회복을 위해 무리한
민족주의 노선을 걷기 시작했고 협조주의를 폐기하고 군국주의로 들어섰다. 이후 1945년 패망으로 다시 서구 협조주의 노선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현재에 이르러 다시 아이덴티티 회복 의지가 발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일본 헌법은 맥아더가 만든 것으로 헌법 구조 상 일본은 전쟁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이것으로 인한 자존심의 상처가 자극이 되어 다시 민족주의 노선을 택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일본 내 복잡다난한 폴리틱스가 전개되고 있는 바, 그 큰 구도에서 한일관계도 파생되고
여러 가지 태도 또한 거기서 파생되는 것이다.
결국은 서구화와 민족주의는 동전의 양면이다.
글로벌리즘하고 민족주의라는 건 같이 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서구화가 진행되었을 때 발생하는 아이덴티티 위기를 관리하고 승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대응자세
우리는 지금 일본과의 관계에 적절히 대응하기 위해서 정확히 문제의 본질을 알고 있어야한다.
한일관계 문제의 본질, 발생지는 단연 역사문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식민지 문제는 전 세계 식민지 구도에서 굉장히 특이한 스탠스로 정교한 식민지 논리를 준비해야 한다. 또한 식민지 문제와 전쟁문제는 다르다.
사실상 식민지에 관한 국제법이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불법성을 요구할 때도 우리가 국제법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하고 출발해야 한다.
역사문제는 단 칼에 해결될 수가 없다.
아젠다 세팅의 문제이고 해결을 서두를 게 아니라 관리해나가면서 하는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