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칼럼] 대한민국의 저력을 다시 한 번 - 이승철 전경련국제경영원 원장
신참 어부는 폭풍우를 제일 겁내지만 노련한 고참 어부는 짙은 안개를 더 두려워 한다는 말이 있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안개가 눈에 보이는 폭풍우보다 더 무섭다는 뜻이다. 우리 경제는 1997년 IMF 외환위기라는 폭풍우를 맞닥뜨렸다. 그리고 2015년 대한민국은 저성장이라는 안개 속에 갇혀 있다. 지금 우리는 고참 어부조차 경계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위험에 처한 것이다. 경제위기를 극복한 우리 국민에게 현재 직면한 어려움은 거뜬히 회복할 수 있는 수준인 것일까. 유감스럽지만 구제금융을 받았던 당시보다 지금이 더 걱정스러운 상황이다. 올 들어 수출은 6개월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해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래 최악의 성적표다. 연초 회복 기미를 보이던 내수마저 메르스 여파로 얼어붙어 경제성장률은 2% 대에 그칠 전망이다. 2003년 이후 세계 평균 성장률에 못 미치는 추세가 올해도 이어질 모양이다. 가장 큰 문제는 보이지 않는 위기에 대한 국민들의 공감대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모두가 어려운 현실을 인식하고 자발적으로 뜻을 모았다. 1998년 금모으기 운동에는 약 350만 명이 참여해 18억 달러가 넘는 외화를 모았다. 정부도 회사채 발행 한도 폐지 한시적 규제 유예 등 특단의 위기조치를 내놨다. 반면 지금은 저성장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 ‘저성장 불감증’이 만연한 실정이다. 위기를 제대로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마당에 위기 대책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기대할 수 있을까. 세계 경제 환경도 그동안 불황으로 바뀌었다. 1998년 미국 중국은 각각 4.5% 7.8%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말하자면 세계적인 호황 속에서 ‘우리만 잘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소비가 9% 투자가 21% 급감할 때 수출이 14% 증가해 경기회복의 큰 버팀목이 됐다. 그러나 IMF에 따르면 올해 미국의 성장률 전망치는 3.6%에서 최근 2.5%로 하락했으며 중국 또한 7% 성장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늪에서 빠져나오려고 해도 손 내밀어 줄 수 있는 국가가 없다는 얘기다. 이처럼 내부 공감대도 얻지 못하고 외부 조력자도 충분치 않지만 긍정적인 면도 있다. 과거와 달리 국내에 충분한 자금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1997년 말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은 39억 달러까지 급감했다. 난국을 극복할 자금도 여력도 부족했다. 지금은 다행히 어려움을 타개할 여력이 있는 상황이다. 최근 한국은행은 6월 말 외환보유액이 3747억 5000만 달러로 세계 6위 수준이라고 발표했다. 우리나라의 국부(國富)를 뜻하는 국민순자산도 GDP의 7.7배에 달한다. 경기 침체에서 벗어날 기초 체력은 확보된 셈이다. 이러한 여력을 저성장 극복의 발판으로 삼는 것은 어떨까. 우리 경제는 지금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 일본처럼 잃어버린 20년을 맞을 수도 재도약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 마라톤에서도 모두가 질주할 때보다 다른 선수들이 주춤할 때 오히려 앞으로 치고 나갈 틈이 생긴다. 이번 위기야말로 대한민국이 선두에 나설 진짜 기회다. 앞서갈 타이밍을 잡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적 단합이다. 안개를 헤쳐 나가려는 각오를 다지고 과거의 단결력을 되살리자. 당면한 위기를 국운융성(國運隆盛)의 기회로 만드는 것은 우리 모두의 역할이다. |